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제게 취향을 강요하지 마세요

커피에세이

by architect.j 2019. 6. 10. 22:28

본문

불편한 이야기 시리즈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드는군요.(사실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겠죠? 다 최소한의 면책을 마련하고자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죠)

 

바로 본론입니다.

제발 부탁이니,

"당신의 커피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럼 안녕!

하고서 글을 마무리 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안 되겠죠. 네, 이건 진심이에요.

 

 

라즈베리, 블루베리, 가끔은 어떤 열대과일의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아무도 몰라주는 베리 사실 알고 보니 그게 배리배리일지 베리베리일지 모르는 어떤 베버리지의 비밀 레시피 같은 플레이버리. 여러분은 커피 속에 있는 다양한 향미가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고 계시나요? 기껏해야 저는 제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겨우겨우 세어 볼 정도의 개수만 알고 있는 것 같지만요!

 

참으로 재밌는 음료임에는 확실합니다. 하면 할수록 제가 생각하는 모든 개념과 관념이 무너져내리다가 다시 또 견고히 바로 서기도 하고 그러다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기도 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는 기분이 이런 거겠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제게 '취향'을 강요하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그게 '강요'인지도 모르고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제게 있어서 그건 어떤 선을 넘은 일임에는 분명해요. 그리 유쾌하지 않거든요. 진심으로.

 

 

그런데도 어째서 이건 바디가 어떻고 이건 농도감이 이런데, 여기서 느껴지는 향미가 특히 와이니하고 발현 정도는 아쉽지만 날짜가 조금 지나 숙성된다면 이 또한 끝내주리라 불라불라. 하? 정말로요? 왜 너는 그걸 못 느끼냐 이게 진짜 커피다. 커피라면 자고로 이래야 한다. 진짜 맛있는 커피를 맛보지 못한 거다. 그런 걸로는 커피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아, 그만, 그만해주세요. 현기증이 나려 해요.

 

미슐랭 가이드 별 4개짜리 식당마저도 달음박질쳐서 나오는 사람한테 기껏 커피를 가지고 이렇게 못살게 굴다뇨. 너무 하는군요! 어쨌든 누구 입맛에는 죠스 떡볶이 떡순튀오 세트가 최고일 수도 있잖아요. 가끔 미슐랭 별 4개짜리가 생각나긴 하지만 이제는 정확히 그게 어떤 맛이었는지 잘 기억 안 나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요.

 

대체 언제부터였을까요. 이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제가 본격적인 커피를 시작 한 때, 그러니까 핸드드립을 처음 배웠을 때는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지 그땐 순수하게 커피를 내리고 음미하고는 했답니다. 제 손에 쥐어진 칼리타와 멜리타 플라스틱 드립퍼 두 개면 늘 행복한 커피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죠.

 

 

유행이라는 것이 무섭다고 생각해요. 소리 소문 없이 어느 틈엔가 어디선가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해서 하나 둘 물들어 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분명 유행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중 따르지 않는 사람은 도태된다고 느끼게 돼요. 아니면 유행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이 도태시켜 버리는지도 모르죠. 그런 측면에서는 저는 그들에게 반동분자, 이단아였겠죠. 지금도 그런 측면이 없진 않지만.

 

아직도 기억이 나는 일화 중 하나는 그래도 나름 몇 년이나 고생하며 연습하고 연습한 제 핸드드립을 보고서 비난과 혹평과 그건 아니라는 훈계를 주신 분이 하나 있었죠.(꼭 집어 하나는 아니네요. 꽤 여럿) 네 뭐  그분이 고작 핸드드립을 시작한 지 6개월도 안되었다는 사실이 비극적이라기보다, 결과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지만 커피맛이 좋게는 나오네'라는 그의 판정 선언을 듣는 게 제겐 더욱 큰 고역이었습니다. 그냥 당신과 내가 다를 뿐이고, 추출에 따른 수율의 차이인데 여과지를 어떻게 접었네, 드립 방향을 어디로 줬네, 주전자를 어떻게 잡았네... 아, 그만할까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싶습니다. 우리 모두 생김새가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른 것과 같이 그저 다를 뿐이잖아요. 삼겹살을 약간 설 익혀 먹든, 바짝 익혀 먹든 - 돼지고기니까 소고기로 바꾸죠- 그래요 소고기를 레어로 먹든 미디엄으로 먹든, 사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내가 레어를 먹는다고 해서 웰던의 기준을 얕잡아 볼 수는 없다는 말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독 커피에서는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누구의 방식이네 무슨무슨 드립이네 시쳇말로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지는 꼴이라니 대체 무얼 하고들 있나요?

 

이 추출영상을 보고 "이단이다!" 하고 외칠 분들에게 경외를.

https://www.youtube.com/watch?v=MPDfn--vxK8

 

이런 일은 비단 핸드드립에서 빚어진 것만이 아닙니다. 커피를 하는 동안, 커피를 하는 내내 그래요. 무언가 자신만의 기준이 있는 건 저도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깔아뭉게고 정도(正道)를 논하다니요. 그것도 수치로 판가름되는 척도가 아니라 감각에 의존한 정도라니. 아이러니가 아니라 미신과 종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맛과 라이트 로스팅을 모르면 바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커피 맛에서 단맛의 기준이 좀 모호하면 어떤가요. 그리고 그거 조금 더 친절하게 알려주고 다름은 인정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패배하기라도 하나요. 그건 패배가 아니라 여러분 의식에 아주 낮게 깔려있는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아집은 아닐까요.

 

좋습니다. 이제 저나 여러분 모두의 취향을 잘 알겠으니 우리 서로에게 강요하지는 말자구요.

'커피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타벅스에 가면  (0) 2019.06.12
작은 카페를 찾는 이유에 대해  (0) 2019.06.11
철학 없는 킨포크(kinfolk) 철학 좇기  (0) 2019.06.10
바리스타란 무엇일까  (0) 2019.06.09
인생커피를 찾습니다.  (0) 2019.06.09

관련글 더보기